오늘날 청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젊음, 패기, 열정이라는 단어도 생각나지만 구직자, 삼포세대, 도움이 필요한 계층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고 생물학적 연령으로 재단하며 그 의미와 규모를 축소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란 단어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청년의 시작은 훨씬 더 포용적이었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계층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 청년운동의 지향점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제언을 드립니다.
한국에서 청년이라는 말은 1896년, 도쿄 유학생들의 잡지에서 처음 등장했고, 1903년 선교사 언더우드의 주도로 ‘황성기독청년회’라는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요즘 ‘기독교청년회’라 지칭)가 탄생한 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이 일제 침탈 하에서 정치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유사한 이름의 단체들을 많이 설립하며 청년이란 용어는 1910년대 유행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에는 소년으로 있다가 결혼을 하면 곧바로 장년이 되는 것이었고 청년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새로운 용어인 ‘청년’을 널리 알린 YMCA는 기독교 단체이지만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즉 청년이라는 용어는 태생에서부터 종교적 교파도 초월하고, 민족주의자들도 이용할 정도로 신자와 비신자,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포용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성세대 및 기성세대들의 가치관을 거부한 ‘새로움’과 ‘신문명’의 건설이라는 희망의 메시지, 위기에 처한 한국 민족을 구해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는 돌파구를 모색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이렇듯 청년의 유래는 생물학적 연령으로 정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희망의 용어였습니다.
인구 감소, 소비 및 성장률 둔화, 인구의 고령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은 정책적 지원에서 소외되고 보호받지 못해 시간의 빈곤, 금전적 빈곤, 기회의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그럼 소외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계층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어떻게 더 포용적이고 희망을 주는 계층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복지선진국인 스웨덴의 여성운동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 세기동안 양성평등이 제1 과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참정권을 얻기 위해 투쟁을 하였으나 남성중심의 기득권에 의해 번번이 좌절하고 맙니다. 그러다 이들은 단지 여성만을 위한 운동보다는 여성이 포함된 계층에 대한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합니다. 여성의 노동조건을 직접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책보다는 스웨덴 전 국민의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비정규직 여성의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이 아닌 노동착취의 개선을 요구했으며 탁아시설 확충과 보육정책의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기다리지 못하고 지지층의 민심이 떠났을까요? 아닙니다. 여성이 포함된 상위 단체와 조직 전반의 환경 개선을 요구해 동참자를 늘리고 그로부터 하위 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정책의 수혜를 받는 방향으로 여성운동을 전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성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었습니다. 양성 평등을 보장하는 문구의 명문화보다는 교육 사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양성평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인식의 개선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정치적으로 양적인 양성평등 보다는 선진 정치 문화 정착을 요구했습니다.
이렇듯 스웨덴의 여성운동은 단지 여성이라는 문제에만 국한되어 접근한 것이 아니라 소외계층 전반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었고, 갈등과 저항보다는 국민의 적극적 동참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해 노동시장이 개선되고 교육정책, 복지정책 등 사회정책 전반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청년운동은 어떠합니까? 소외계층 전반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제언하고 있습니까? 7월 4일 이인영 원내대표가 청년정책의 일환으로 청년기본법 실현을 약속했습니다. “청년보장제 등 청년이 미래를 꿈꾸도록 희망의 사다리를 놓겠다”고 합니다. 기쁘고 반가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단어 하나만 바꾸면 어떨까 합니다. “청년이 미래를 꿈꾸도록”에서 “국민이 미래를 꿈꾸도록 희망의 사다리를 놓겠다”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청년을 어떻게 규정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한국사회에 청년이 어떻게 비춰지기를 원하십니까? 15세에서 39세까지, 또는 19세에서 34세까지의 일부 계층만을 위해 투쟁하는 청년운동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스웨덴 여성운동이 그러했듯 이제는 한국의 청년운동도 전 세대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던지고 그러한 정책을 제언하면 좋겠습니다. 1900년대 청년이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했듯이 이번에도 위기의 한국을 구하는 데 청년이 앞장서 봅시다.
- 오 세 붕(더불어민주당 충청남도당 홍성•예산 지역위원회 위원장 후보/청년을지로 연구소 연구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