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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지로

일본의 시민 동지들에게

먼저 간단히 역사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이전부터 굴곡져 있지만 그만큼 밀접했습니다. 고대로부터 한반도는 대륙과 보다 가까웠기 때문에 보다 먼저 대륙 문물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고, 일본은 대륙의 신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는 창구가 바로 한반도였습니다. 이 역사는 계속 이어져 조선은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국교를 이어나가고 문물을 전달해 왔습니다. 일본이 유럽과의 교역을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어느 정도 역전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이후 양국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면서 이런 관계는 끝날 듯 보였지만,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국교를 재개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국교는 재개되었고, 조선은 형식상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일본과의 외교를 진행하며 통신사를 파견해 왔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결정적으로 발생한 계기는 역시 개항일 것입니다. 개항 이후 발전해 나가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쇄국을 지속하던 조선보다 먼저 근대 국가로 올라섰고, 이어서 정한론이 대두됩니다. 그리고 꾸준히 국력을 키워나간 끝에 러일전쟁 승리를 통해 자신감까지 얻지요. 아직 근대화되지 않았던 조선은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근대국가로의 발돋움을 위해 숟한 노력을 다했지만 이미 일본까지 열강이 되어버린 마당에 뽀족한 수는 없었습니다. 이어서 한일병탄이 이어지고, 한국은 35년 간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본에게 있어 이 시기, 제국주의 시기는 어쩌면 영광의 나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탈아입구라는 기치에 맞게 낡은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 열강과 동격에 놓일 수 있는 시기였고, 1차대전 당시에는 승전국 지위까지 경험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그 시절의 영광만을 기억하며 뒤에 가려진 식민통치, 국민과 식민지인에 대한 강제동원, 소수의 의견이 인정되지 않던 전체주의의 광풍은 끄집어내지 않으려는 듯 보입니다. 일본 지식인들이 꾸준히 지적하듯,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의 패전과 그 패전의 원인을 내심 인정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일본이 한국전쟁이라는 기회를 살려 전후체제를 부흥으로 이끄는 동안에도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혹독했습니다. 독재정권이 지속되다 4.19 혁명을 불렀고, 그 뒤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정권은 수많은 민주화 유공자를 낳았습니다. 사실상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들입니다. 일본이 베트남전을 통해서도 소소한 특수를 누리는 동안 한국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군대의 파견, 사실상의 용병 노릇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항거와 뿌리내린 저항만이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없는 투쟁과 정치 참여가 결국 한국을 바꾸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일본에서 보기에는 이 역동성과 시민의 정치 참여가 반민주적이고 한심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 방문할 때 종종 보는 수많은 시사, 정치예능 방송에서는 이러한 논조로 한국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한국은 시위가 많아서 성숙하지 않은 민주주의라거나 대통령을 탄핵하다니 말도 안되는 국가라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번달에 방문했을 때는 무려 홍콩의 시위에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며 일본의 평화적 모습이야말로 민주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방송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일본의 평균이라면 참으로 애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늦은 근대화, 굴욕적 식민통치, 뒤늦은 공업화, 형편없는 정치와 독재를 모두 경험한 한국 민중들은 결국 6월항쟁을 통해 직선제를 쟁취하고 전두환 정권의 영구집권을 저지하게 됩니다. 그 뒤 양김의 분열로 인한 노태우 당선이 있어 민주정권의 도래가 늦어졌고, 이어지는 문민정부 때는 경제의 체질적 문제로 인한 IMF 사태에 직면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독재와 개발에 대한 환상이 잔재로 남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는 등 부침은 있었지만 결국 한국의 현재는 4.19 정신과 6월항쟁을 통해 쟁취한 체제의 연장선에 있고, 우리는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누군가는 전직 대통령이 탄핵되고 수감되는 것을 비웃지만 이것이 한국의 21세기입니다. 누구도 국민을 핍박하고 억누르며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우리의 정신입니다. 시위(Demo, Protesr)는 결국 시민의 집회이며 시민의 요구이고 이는 결국 민주주의(Democracy)와 이어집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민중의 힘이고, 민중의 요구는 시위와 집회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이렇게 군사독재와 권력에 의한 시민 기반을 뒤로하고 21세기에 올라왔습니다. 딱 22년 전인 97년의 외환위기에서 일본 금융기관의 매절을 감당하지 못하고 국가 도산 사태에까지 몰아붙혀질 당시, 한국은 이제 갓 민주 국가를 수립한 단계였지만 지금은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체질도 물론 개선됐습니다. 국가부도라는 그늘이 있는 김영삼 정부 때도 군사독재의 잔재인 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한발짝 후퇴가 있으면 그보다 더 전진해 왔고, 이런 극복의 역사에 대해 자신감이 있기에 지금 아베 총리의 무역분쟁에도 의연히 대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은 명백히 20년 전의 한국과 다르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입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전공투를 위시한 시민사회의 정치 변화 요구가 대부분 묵살되었습니다. 자민당 정권이 길게 이어지며 (자민)막부라는 자조가 일본 내 진보 세력에서까지 언급될 정도고, 총리의 장기 집권은 쇼군에 비교될 정도입니다. 일본 민주당이 2009년 역사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기도 했지만 국내 갈등과 동일본 대지진 참사 등의 여파로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자민당 정권에 대해 일본 국민이 염증을 느끼기에는 5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민주당도 거기서 거기라는 정치혐오가 퍼지기에는 5년도 과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좋았던 시절만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일본의 경제위기를 촉발한 플라자 합의가 ‘좋았던 시절’ 일본이 미국 등과 겪은 무역마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듯합니다. 지금 아베 총리의 무역분쟁이 90%라는 지지율을 얻는 배경에는 그러한 인식이 깔려 있는 듯 보입니다. 반면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일본의 시민 동지들이 있다는 믿음을 저는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식민통치 시기부터 조선 민중과 연대해 왔고, 지금도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일본 공산당은 대세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는 야마모토 타로 당대표의 레이와 신센구미가 비례대표 후보 1, 2번을 중증장애인으로 등록하고도 결국 모두 당선에 성공했습니다. 입헌민주당이 비례대표에 오픈리(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는) 게이 의원을 등록해 당선시킨 점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미 중의원으로 활동 중인 오츠지 카나코 의원 또한 입헌민주당 소속인 레즈비언 성소수자이며 지난 지선에서는 오픈리 성소수자 기초의원이 9명이나 당선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꿈꾸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이 이룩한 민주주의를, 21세기를 이야기했지만 한국이 아직 올라서지 못한 21세기에 여러분이 발을 걸치고 있는 부분이, 앞서나가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저력입니다. 한일 갈등이 발생하면 일본에서는 특히 한국이 과거사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의 재해 상황에 별달리 인적 물적 지원을 하지 않는 반면, 한국은 고베 대지진(한신-아와지 대진재) 참사가 일어났을 때, 동일본 대지진 참사가 일어났을 때 위로의 서한을 전달함과 동시에 빠르게 구조대를 파견했습니다. 국민적 모금과 구호물자 전달도 병행됐습니다. 일제시대의 징용피해자, 종군성노예(위안부) 피해자들도 인간적 위로의 차원에서 항의 집회를 중단하기까지 했습니다. 과거를 잊고 현실을 보며 미래를 지향하자는 건 이런 것입니다. 일본이 과거의 잔재에 매달려 일본제국의 꿈을 다시 꾸지 않는 한 한국은 언제나 일본의 이웃이었고, 앞으로도 이웃일 것입니다.


-김환민 <청년을지로>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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