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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지로

20대 세대론에 부쳐 -공정함을 중시하는 세대라는 환상-

20대를 언론이 세대론적으로 분석할 때 꾸준히 붙이는 문장으로 '불공정을 싫어한다, 공정함을 추구한다'가 있습니다. 평창올림픽 때의 남북단일팀에 관련한 이슈도 그랬고, 최근의 조국 법무부장관을 두고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것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퍽 재밌는 현상입니다. 어느 세대도 불공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게으른 분석이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회의 전 구성원이 20대에 대해 무관심함을 증명함에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세대적 특성 삼아서 불공정과 공정을 가르고 청년을 자신의 입맛대로 동원하려는 것이 바로 '공정한 20대'의 본질입니다. 먼저, 공정함이란 레테르를 붙여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쪽의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20대 외에는 20대의 생각을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일단 많이 들어보고자 합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청년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청년 당사자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좋은 예시입니다. 여태껏 이런 방식은 나름 좋은 효과를 거둬왔습니다. 서울에서 처음 시작한 청년수당과 청년 노동자 자산형성 사업이 청년 당사자들의 정책기구인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반면 이런 방식은 근본적으로 정책수립과정에 찾아와서 개입하고자하는 강력한 의지와 열정을 가진 청년들의 목소리가 과대대표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의지와 열정은 청년 개개인이 놓여진 환경과 여유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청년은 매우 한정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앞서 좋은 사례로 들었던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는 모든 청년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덴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 일에 치여 사는 청년은 목소리를 내러 올 여유가 없습니다. 필요성이 강력한 참여 동기가 되므로 그때그때의, 청년문제가 아닌 이슈가 주도적 논제가 되기도 하며,(2019년엔 미세먼지가 그랬습니다.)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대표 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결국 구조적으로 제자리에 앉아서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안일함에서 오는 한계입니다. 행정부의 이런 모습은 사회가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의 축소판입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많은 역경을 넘어서 신문고의 북을 친 뒤에야 간신히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적 취약점이 바로 소위 공정 운운하는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파고들 수 있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여유 없는 20대 동료가 생업에 치이는 동안, 소위 금수저 청년들만이 청년의 목소리라며 신문고를 울려댈 수 있었고, 20대의 유일한 목소리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언론이 현 정권에 등을 돌렸다거나 반목하고 있다며 인터뷰에 소환하는 20대 당사자는 실제로는 20대 남자, 혹은 30대 남자입니다. 동년배 여성은 20대의 여론이 아니라 페미니즘 여론으로 호출당하는 동안 이들이 20대, 청년, 미래세대라는 포지션을 오롯이 가져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청년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한 것은 잊은 채, 가끔 흙수저에게 추월당해 기분이 나쁠 때마다 금수저가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공정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공정함은 대학교에서 정시 입학자가 수시 입학자를 서자 취급하는 것이며, 여성이 남성보다 나은 성과를 얻는 것은 정부가 꼴페미이기 때문이며, 수능 한 번 잘 쳐서 좋은 대학에 갔다고 평생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대학 출신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한다고 외치는 거만함입니다. 언론이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20대의 목소리라며 실어주는 고려대학교의 촛불 집회에서 서울 안암 캠퍼스의 주최자가 지방 캠퍼스인 세종 캠퍼스 학생들의 참여를 막고 세종 캠퍼스도 같은 고려대학교 학생이라며 함께 해야한다는 사람들은 집회 준비 그룹에서 쫓아내버리는, 20대 세대 안에 계급적 차별이 당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 담아내는 20대 공정 세대론의 실체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청년을 규정하는 사회적 위치를 가진 언론에 청년이 많이 진출해야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취업난, 그리고 노인빈곤으로 인해 이것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으로라도, 언론이 앉아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할 짓 없이 키보드로 세상을 재단하는 소수의 20대 남자들을 청년의 전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직접 청년들이 세상과 부딛히는 최전선에 나서야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청년들의 삶을 전부 만나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엮어내야합니다. 언론의 태업으로 뒤틀린 공정이 미래세대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한 것을 철저히 반성하고, 명문대 20대 남성이 "우리는 공정을 원한다" 할 때 날카로운 목소리로 "공정함을 원하지 않는 세대가 어디있느냐, 너희가 원하는 것은 사실 불공정이다."라고 되물어야합니다. -이종찬 <청년을지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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